사봉시조기념관

 

장순하시조학술상

백수 정완영(1919~ ), 사봉 장순하(1928~ ), 고하 최승범(1931~ ). 한국 현존 3대 원로 시조시인인 사봉선생이 2012년 5월 1일 2만여 권의 장서를 지리산문학관에 기증하여 사봉시조기념관으로 꾸몄다. 고등학교 국정교과서에 혁신시조 <고무신>이 실린 사봉선생의 시조정신을 기리고자 시조시인대상을 제정하여 사봉선생에게 헌정하였다.

사봉선생이 춘천에서의 우거생활을 정리하고 2014년 3월 4일 지리산 함양으로 이거하여 지리산시인이 되신 것을 기념하여 지리산문학관 명예관장으로 추대하여 예우를 갖추었다. 사봉시조를 선양하기 위하여 2014년 8월 8일에 사봉시조낭송대회를 개최하고 2015년 6월 8일에는 함양 출신 한국 대표시인 허영자 시인 초청, 허영자시낭송대회와 장순하시조낭송대회를 겸행, 개최하였다. 1회성 행사에 그쳐 그만 접고 연구장려를 위하여 장순하시조학술상을 제정한다. 장순하 사봉시조에 대하여 연구 발표한 우수 논저를 발굴하여 상금과 함께 격려, 시상한다.

 

한국3대 원로시조시인 사봉(史峰) 장순하(張諒河) 선생

2만 장서를 지리산문학관에 기증, 부설 사봉시조기념관 개설(2012년 5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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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순하 [ 張諒河 ] 글자크기보통 크기로 보기

 

호 사봉(史峰)

출생-사망

1928 ~

출생지

전북 정읍(井邑)

직업

현대시조시인

 

현대 시조시인. 전북 정읍(井邑) 출생. 호는 사봉(史峰)).

 

1957년 정부 주최 제1회 전국시조백일장 예선에 장원, 다음 해〈현대문학(現代文學)〉에 《울타리》가 추천되었다. 그보다 앞서 박병순(朴炳淳)이 주재하던 시조 전문지 〈신조(新調)〉의 주간(主幹)을 맡기도 했다. 한국문인협회(韓國文人協會) 이사(理事), 한국시조작가협회(韓國時調作家協會) 이사를 역임.

 

형식면으로는 평시조(平時調)는 물론 엇시조와 사설시조(辭說時調)를 고루 시도(試圖)하고 있으며, 때로는 평시조와 사설시조의 혼작(混作) 혹은 평시조와 엇시조의 혼작까지 시도하고 있다. 자형(字型)의 변화 및 글자의 배열과 위치 등으로 효과를 거두어 보려고, 한때 자유시에서 유행했던 시각적(視覺的)인 방법을 시조에서도 시도해 왔다. 이같은 왕성한 탐색(探索)과 실험정신(實驗精神)은 시조의 형식면에만 그치지 않았다. 시에서 추구하는 대상(對象)도 자연과 인생, 개인과 집단, 가정과 사회, 민족과 국가 등 다양한 진폭(振幅)을 보이고 있다. 이같은 시정신은 내면적인 세계보다는 대외적인 세계로 발산되고 있으며, 이들은 대개의 경우 설명적인 어법(語法)을 통해 형성된다. 경험론적 시관(詩觀)으로 통하면서 이론적 사고(思考)를 바탕으로 하여 느끼는 시라기보다는 생각하는 시에 속한다.

 

시조집으로 《백색부(白色賦)》가 있다.

 

앵두나무는연작시조 대표작의 하나.

 

「또 어느날 뜨락에서 이름도 성도 모를 시알 하나 주워/헐었다 쌓았다 무심한 흙 장난이/한 그루 앵두나무를 여기 서게 한 것이다.」

 

이 시조는 비교적 장형(長型)에 속하는 5수 1편 중 둘째 수다. 간절한 생(生)의 철학을 시간(時間)이라는 차원에서 재조직하여 시의 세계로 승화(昇華)시켜 놓았다. 곧 모든 생명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명멸되어 간다는 오묘한 자연의 법칙을 앵두나무를 빌어 형상화시켰다. 시조라는 제약된 그릇 속에 별 구속을 받지 않고 시어를 구사해 놓은 것은 그의 숙련된 기교(技巧)의 결과라 하겠다.

 

경력사항-

시조 전문지 〈신조(新調)〉의 주간(主幹)을 맡기도 함

한국문인협회(韓國文人協會) 이사(理事) 역임

한국시조작가협회(韓國時調作家協會) 이사를 역임

 

수상내역1957정부 주최 제1회 진국시조백일장 예선에 장원


 

 시조21 | 시조21

 http://sijo21.com/20107729606

장순하 시인의 <고무신>-조동화(시인)

 

시조21

 2005-11-02 19:53:25, 조회 : 527, 추천 : 56

 

장순하(張諄河) 시인의 <고무신>

                                                     조동화(시인)

 

장순하 시인은 1928년 전라북도 정읍시 소성면 중광리 185번지에서 홍성 장씨 노현(弩鉉)과 울산 김씨 효순(孝順) 사이의 8남매 중 넷째이자 3남으로 출생했다. 어려서 젖이 적어 허약 체질이 되었다 하며, 한학자인 조부에게서 천자문을 배우다 소학교에 월반(越班) 입학하여 졸업했다. 광복 후 한글학회에 부설되었던 세종중등교사양성소를 수료(1948~50)하고, 1950년부터 이리 남성고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 무렵 여흥 민씨 복순과 결혼(1956)을 한편, 원광대학 국문과에 편입학하여 졸업(1958했다. 1966년 이리 남성고교를 퇴임하고 출판계로 자리를 옮겨 편집과 저술로 일관했는데, 도서출판 일지사 편집고문(1966~69)을 거쳐 금강출판사를 설립 운영하기도 하고, 월간 수험지 『대학입시』주간, 시지 『풀과 별』발행인, 한국도로공사 편찬실장, 도서출판 가리내 대표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는 조숙한 문학소년으로 소학교 졸업 전에 일본문학전집과 일역본 세계문학전집을 독파했고, 처음에는 자유시를 공부하다가 세종중등교사양성소에서 가람 이병기의 강의를 받으면서 시조 창작에 전념했다. 처녀작 <어머님전 상사리>를 『새교육』에 발표한 이후 1951년 시조동인지 『신조』에도 잇따라 작품을 발표했고, 1957년 개천절 기념 전국백일장에서 장원 당선하여 『현대문학』 초대시인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그는 올해로 50년에 육박하는 시력(詩歷)을 쌓아온 우리 시조단의 몇 안 되는 원로로, 진작부터 투철한 실험정신(實驗精神)으로 전통시조의 형식을 탈피하는 새로운 형식을 꾸준히 추구함으로써 현대시조의 형식과 내용 면에 새 영역을 개척해왔다.

그가 낸 시조집으로는『백색부(白色賦)』(1966),『묵계(墨契)』(1974),『길손』(1993), 『백두산 가는 길』(1993),『서울 귀거래(歸去來)』(1997),『후일담(後日譚)』(1997), 『남한산성』(1999), 『사랑학 입문』(1999) 등이 있고, 편저로 현대시조선집『달빛과 사상』(1983), 고시조 선해『동창이 밝았느냐』(1985) 등이 있다. 이 외에도 그는 검인정 교과서인『고등작문』(1967),『고등한문』(1978,1983), 『중등한문』(1983) 등 20여 권의 국어와 한문 계통 참고서를 저술했으며, 논문 발표도 활발하여 <시조문학 임상 고발>(현대문학,1968), <현대시조 60년사>(현대문학,1968), <현대시조문학의 거점>(현대문학,1969), <포효와 사모의 시>(월간문학,1970), <삼무(三無)의 문학>(풀과 별, 1973), <사설시조론>(노산고희기념문집,1973), <현대시조의 방향>(시조시인협회 세미나, 1973), <현대시조의 상황의식>(현대시학,1974) 등을 발표했다.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시조작가협회 부회장을 두루 역임했으며, 가람시조문학상(1981), 중앙시조대상(1987) 등을 받았다.

 

눈보라 비껴나는

전―군―가―도(全群街道)

 

퍼뜩 차창으로 스쳐 가는 인정아!

 

외딴집 섬돌에 놓인

  하 나

    둘

   세 켤레

 

                ― <고무신> 전문

         

보는 바대로 이 작품은 단수이다. 장순하 시인의 시조들을 훑어보면 <앵두나무는․1>, <묵계>, <징검다리>, <도깝아> 등 오히려 연시조 가운데 명작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굳이 이 단수를 택한 까닭은 이것이야말로 그의 시인으로서의 면목을 약여(躍如)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현대시조 중흥기에 이 작품만큼 문단의 주목을 받은 작품도 드물 것이다.

내용은 별 어려운 대목이 없다. ‘겨울 어느 날, 눈보라가 비껴나는 全群街道를 차를 타고 달려가노라니 문득 차창에 한 장의 스냅사진과도 같은 풍경이 스쳐간다. 바로 어느 외딴집 섬돌 위에 놓인 고무신 세 켤레다. 언뜻 보기엔 귀양이라도 사는 듯 초라하고 쓸쓸한 집이건만 오순도순 정겹게 살아가는 세 식구의 단란함이라니!’ 정도로 보아 무리는 없으리라. 나아가 이 작품이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소박하면서도 단란한 시골 인정에 대한 동경’ 그 이상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보여주는 기법은 결코 예사롭지 않다.

우선 초장의 ‘全―群―街―道’라는 표기가 눈길을 끈다. ‘全群街道’가 전주와 군산 사이의 죽 뻗은 도로의 명칭임은 익히 알려진 그대로다. 특이한 점은 부호 중에 하나인 ‘―’를 글자 사이에 넣어서 표기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초장의 부족한 음수율을 커버하면서 아울러 시각적으로 죽 뻗은 도로를 연상시키는, 장기로 비유하면 바로 양수겸장과도 같은 기법이 아니겠는가. 혹자는 그게 뭐 그리 대단한 것이냐고 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무릇 새로움이란 고정관념을 깨지 않고서는 결코 생겨나지 않는 법이다. 감히 단언하거니와, 이만한 정도의 표현이라면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왕성한 실험정신(實驗精神)과 발랄한 재치(才致), 그리고 사고의 유연성(柔軟性)이 동반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것도 전례(前例)가 거의 없는 그런 시기에 말이다.

중장은 다른 부분과 달리 밋밋하다. 단지 ‘스쳐 가는 인정아!’라는 영탄(詠嘆)이 잠시 우리의 눈길을 끌 뿐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별 특징이 없는 이 밋밋함 역시 종장의 대 폭발을 염두에 둔 폭풍전야와도 같은 움츠림이라 할 것이다.

종장도 첫 구는 여느 시조나 다름이 없는 평범한 내디딤이다. 그러나 ‘외딴집 섬돌에 놓인’이라는 관형구를 따라가다 보면 홀연 천인단애(千仞斷崖) 아래로 미지의 세계가 열려 있는 듯한 아찔한 형국이 거기 있다. 기호인 네모에 둘러싸인 ‘하나 둘 세 켤레’가 그것이다. 이것은 우리 시조사상 하나의 획기적 표현이라 할 만하다. ‘섬돌’이라는 사물의 대용품으로써 그림을 과감히 시 속에 도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조와 자유시를 통틀어 초창기 우리 시의 ‘보여주기의 시각적 표현’은 모더니즘의 선구자 김기림의 <日曜日 行進曲>에서 보듯 문자의 대각선 나열이나, 초현실주의자 이상의 <▽의 遊戱―>에서 보듯 글자 크기의 기호 나열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고무신>을 보라. 큰 네모가 정말로 섬돌 위에 놓인 신발 같은 글자를 등에 업은 채로 있지 않은가! 아울러 그 네모 속의 글자가 ‘하나’와 ‘둘’과 ‘세 켤레’가 각각 크기가 다르게 표기되어 있는 점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아버지의 신발이 제일 크고, 어머니의 것은 그 다음, 그리고 아이의 것은 가장 작다는 사실을 나타낸 것으로, 그 세심한 배려가 눈부시기 이를 데 없다.

1983년에 나온 황지우의 베스트셀러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를 보면, <한국생명보험회사 송일환씨의 어느 날>이라는 시에 안의섭의 <두꺼비> 만화 두 커트가 들어 있는 것이 보인다. 작품 <고무신>이 수록된 장순하 시인의 시집 『白色賦』가 나온 것이 1966년이니, 시집 간행 연도로만 단순히 비교해 보더라도 황지우의 그것에 비해서는 무려 17년이나 앞서 있다. 결국 그 이른 시기에 그는 전인미답(前人未踏)의 당찬 발걸음을 내딛었으니 실로 놀라운 개안(開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시인 이승훈이 1996년 『현대시사상』겨울호에 <준이와 나>라는 시를 발표한 일이 있다. 그런데 이 시는 해괴하게도 <준이와 나>라는 시의 제목만 문자로 표기되어 있고 내용은 자신의 어린 아들을 안고 찍은 사진 한 장을 보여줄 뿐이다. 그리고 이 시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그의 저서 『해체시론』이라는 책을 보면,

‘제목만 있고 시는 없다. 그렇다면 사진이 시란 말인가? 시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 사진은 1995년 겨울 아내가 찍어준 일종의 기념사진이다. 가족 앨범에 넣으면 기념사진이 된다. 그러나 앨범에는 제목 같은 건 안 붙인다. 붙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안 붙인다. 나는 이 사진에 제목을 붙였고, 시 계간지에 발표했고, 시를 쓴 사람이 이승훈이라고 밝혔다. 그러니까 엄연히 시다. 쓴 사람 이름이 나오고 시지에 발표하면 시가 된다.

그러나 앨범에 붙이면 기념사진이 되고, 내 책상 앞 벽에 걸면 사진―그림이 된다. 잃어버리면 내가 찾는 물건이 되고 사진관에서는 돈이 되고 준이에게는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 되고, 장난감이 된다. 시는 어디 있고 사진은 어디 있는가? 시는 시라는 이름의 제도 속에 있고, 사진은 앨범이라는 이름의 책 속에 있다. 그리고 이 시는 누가 쓴 것인가? 아내가 찍었으므로 아내가 저자인 것 같지만 분명히 내 이름이 나오므로 내가 저자인 것도 같고, 그러나 나는 제목만 붙였다.

저자는 없다. 낱말, 글, 문자는 저자의 부재, 죽음을 운반한다. 그러나 나는 이 시의 저자로 원고료를, 그것도 4만원이나 받았다.(받을 것이다.) 고마운 일이다. 4만원이 어디인가? 파출부 하루 노동의 대가는 3만 5천원이다.(하략)’

라는 자신의 시에 대한 변이 나온다.

초정 김상옥의 <굽 높은 제기>라는 시에는 ‘시도 받들면 문자에 매이지 않는다.’는 구절이 들어 있다. 어쩌면 이승훈의 <준이와 나>라는 시는 십중팔구 문자를 벗어난 문자 밖의 시일 터이다. 이것은 확실히 기발한 시임에 틀림이 없다. 근대미술의 한 기법 가운데 콜라주라는 것이 있다. 이는 화면(畵面)에 종이, 철사, 나뭇잎 따위를 붙이는 것으로, 일종의 그림 속의 그림인 셈이다. 예컨대 나뭇잎은 원작자가 자연이지만 화가가 그림에 그것을 붙이면 곧 그의 그림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쯤에서 말하고 싶은 문제는 시인 이승훈이 콜라주 기법으로 시를 쓴 것이 전혀 외부적 요인이 없이 나온 것인가 하는 점이다. 몽골 국립박물관에서 칭기스 칸과 그 후손들이 정복한 땅의 판도를 시대별로 색깔을 달리해서 한 지도에 그려놓은 것을 본 적이 있다. 그것은 칭기스 칸이 정복한 땅보다 그 후계자 오기데이 칸 때의 땅이 더 크고, 나아가 쿠빌라이 칸 때의 판도가 유라시아 대륙을 아우를 만큼이나 극대화된 것을 한눈에 보여주고 있었다. 모든 문명이 그렇듯이 문학의 영역 확대라는 것도 결국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한 사람이 드넓은 판도를 한꺼번에 개척하는 것이 아니라, 장구한 세월을 두고 각기 다른 사람들이 뒤이어 한 걸음씩 개척한다고 보는 것이 보다 온당하고 설득력 있는 가정이라는 이유에서다.

만일 그렇다면 장순하 시인의 <고무신>은 시의 기법상 뚜렷이 한 획을 그은 작품으로 평가되어 마땅하다. 시 속에 작은 액자를 방불케 하는 큰 기호의 도입은 본격적 콜라주 기법의 한 단계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비로소 우리는 ‘김기림, 이상(기초 단계)→장순하, 황지우(비약 단계)→이승훈(완성 단계)’라는 시에 있어서의 콜라주 기법 발달의 한 계보(系譜)를 마침내 유추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으로 그의 <고무신>에 대한 나의 고찰도 일단락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화제를 바꿔 앞에서 이미 언급한 그의 왕성한 ‘실험정신(實驗精神)’에 말미암은 두어 가지 소회(所懷)를 덧붙이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할 때가 된 셈이다.

장순하 시인의 실험정신을 말함에 있어 빠뜨릴 수 없는 사항 중 하나는 그의 사설시조의 활성화에 대한 기여일 것이다. 사설시조의 창작이야 가람 이병기가 이미 <공손수>, <풀벌레>, <보리> 등의 작품을 창작한 바 있었고,  조운의 저 유명한 <구룡폭포>도 있으므로 그가 그것을 시도했다 해서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당시의 사설시조 창작은 그 빈도에서 평시조나 연시조로 된 정격시조의 그것에 2~3%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말하자면 당시의 사설시조는 어디까지나 주식(主食)인 평시조나 연시에 곁들인 별미(別味) 정도 이상의 의미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사설시조가 일대 전기(轉機)를 맞기 시작했다. 그것은 상당 부분 『노산고희기념문집』에 발표한 그의 논문 <사설시조론>과 시범이라도 보이듯 써서 발표한 몇 편의 사설시조가 기폭제(起爆劑) 역할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하여 사설시조 창작은 시조단에 요원(遼遠)의 불길처럼 번졌고, 그 이후 대개의 경우 시조집을 낼 때는 10편 내외의 사설시조를 곁들이는 것이 상례(常例)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소수이긴 하지만 사설시조만을 오로지 창작하여 사설시조집까지 자랑스럽게 상재(上梓)하게 된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바대로 사설시조는 조선후기의 산문정신(散文精神)의 발흥에 따른 부산물이었다. 그리고 그 시기는 자유시가 존재하지 않는 시기였으므로 그것은 그대로 스스로의 존재에 확고한 당위성이 있었다. 그에 비해 오늘날은 자유시가 전성기를 구가하는 시기이므로 사설시조는 그만큼 그 존재에 당위성이 희박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현재 사설시조의 세력은 어느 시대에 못지 않게 왕성하다. 그러므로 그 활성화의 원인이 어디에 있든 이제 와서 그 존재 의의를 왈가왈부한다는 것은 온당치 않다. 세상일이란 반드시 이치에 맞는 방향으로만 진행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설시조의 존립 문제는 전적으로 수용자들에게 달린 문제이며, 장순하 시인의 사설시조 활성화에 대한 공과(功過)도 수용자들이 얼마만큼 수준 높은 작품을 써주느냐에 따라 먼 후일 희비가 결정될 일이라 할 것이다.

장순하 시인의 실험정신의 산물로 또 하나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있다. 다름 아닌 그가 창안한 경시조(輕時調) 문제이다. 사설시조가 시조의 형식에 직결된 문제라면 이것은 시조의 내용에 직결된 문제이다. 짐작하건대 경시조란 말 그대로 가벼운 담론에 해당하는 것들을 시화(詩化)한 것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어떤 가벼운 충동 끝에 창안한 것이 아니라, 그 나름의 필연적인 내부의 요청에서 만들어낸 시조임이 분명하다. 그는 이미 『백두산 가는 길』,『후일담』, 『사랑학 입문』등 세 권의 경시조집을 묶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그의 경시조에 대해 시인들로부터 들어온 말들을 종합해보면 대체로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면 쪽으로 무게가 쏠렸던 것을 기억한다. 이를테면, 시조의 격을 떨어뜨렸다거나 시조를 우스갯거리로 전락시켰다는 단편적인 평가가 그것들이다. 그러나 고시조, 특히 조선후기의 사설시조들을 일별(一瞥)해보면 이 경시조에 대한 평가도 부정적이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조선의 사설시조에는 우리가 목도하는 바대로 외설적(猥褻的)인 것과 언어유희적(言語遊戱的) 작품들이 좀 많은가. 그에 비하면 그의 경시조들은 가벼운 언어유희는 될지언정 낯뜨거운 외설은 아니다. 어떤 내용도 금기시하지 않으면서 예술성을 추구하는 오늘날의 자유시를 생각해볼 때, 우리 고유의 정형시 시조도 단순함보다는 다양한 존재 양상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그의 경시조 역시 현대시조의 내적 영역의 확장이라는 점에서 이제는 응분(應分)의 긍정적 평가를 받아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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